sermon
출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13: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런 제목으로 말씀 묵상하겠습니다. 이 말씀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전치사입니다. 백성 ‘뒤에서’가 아니고 ‘앞에서’ 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이는 그냥 쓰여진 것이 아니고 너무도 정확하고 엄밀하게 성령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개입하셔서 기록한 책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는데, 무엇이 그리 했다는 것입니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떠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 능력이 백성앞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서를 볼 때 하나님 백성들의 참으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민족의 대이동 민족의 거대한 해방의 역사라는 것은 어느 역사기록에도 찾아볼 수 없는 실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역사인 것입니다. [창12장]에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 지시할 땅으로 가는 것도 매우 위대한 탈출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믿음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개인이 아닌 민족 공동체 전체가 포로로 잡힌 나라를, 그것도 노예된 백성들이 탈출한다는 것은 실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탈출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가나안땅으로 끝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면서 스스로 가야하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라암셋에서 숙곳까지[출12:37].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탈출 시작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는 것인데, 그 놀라운 역사와 능력을 체험하는 자들은 항상 그들이 하나님 앞에 먼저 세우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서 라암셋에서 숙곳까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창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 모리아산까지 3일의 길을 갔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결단해서 나온 기간입니다.
출13: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기 올 때 까지’ 라는 것입니다. 에담은 숙곳 근방이니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로가 너희들을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간다고 말하고 나오라” 해서 그렇게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결단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가운데 이런 기간이 있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해나갈 때 이런 기간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실 수 있는 분이시고 다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항상 이러한 신앙의 원칙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이것 주세요.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할게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것 먼저 해보라. 그러면 내가 거기 채워줄테니. 네가 상상하는 이상의 것으로 부어 줄테니.”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고 살자면, 저마다 이 삼일의 기간 스스로 믿음을 세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크게 역사하실 수 있는 조건을 세우는 것입니다.
[출13장] 본문 읽기 전에 그 앞에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가 보내주지 않으니 10가지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는 이야기들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앙을 내릴 때마다 무슨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사.’ ‘그 마음을 완강하게 하사.’ 참으로 이것이 이해되지 않는 말입니다. 부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끄집어 내시려는데, 왜 그분이 바로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사’ 가 아니고 ‘강퍅하게’ 하시는가. ‘완강하게’ 하시는가.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때론 내가 선을 행하는데도, 내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일하는데도 그것을 막는 것 같고 그 일이 잘되기는 커녕 불미스런 일만 더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크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오스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시적으로 보면 그 일이 불행이고 불미스럽고 나쁜 일이지만,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그 일이 일어난 이유를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마치 바다가 그렇습니다. 파도가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이리 치고 저리 치지만, 그러나 물의 큰 흐름, 해류(海流)라는 것이 있다 했습니다. 그것은 파도와 상관없이 일정한 방향으로 도도하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 작게 보면 인재(人災)니 천재(天災)니 해서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실수로 혹은 상황적으로 어찌할 수 없어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이 기억하고 살아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에 10가지 재앙을 공부해보면 반복적으로 많이 나오는 말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강퍅케 하사’입니다. 하나님 백성을 풀어주겠다 약속한 바로가 10번씩이나 말을 바꾸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포기할 만도 한데,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자안에는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가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의 강퍅했던 그 마음 때문에 내어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붙잡으려고 바로가 군대를 보냅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군대가 홍해에 다 수장(水葬)되었습니다. 우리는 ‘아, 하나님 백성들을 괴롭히는 바로의 군대를 아주 깨끗하게 정리하시려고 그런 것이었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요셉 이야기를 많이 묵상했습니다. 참으로 요셉의 일생이라는 것이 시련의 연속이 아니었습니까. 그는 형을 사랑했지만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빠뜨려지고 또 노예로 팔려가고 또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누명을 쓰고, 그리고 또 감옥에 들어가 그 힘든 옥중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계속되는 불행들을 그 당시에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선한 자가 이런 불행을 당하는가. 왜 성실한 자가, 왜 하나님을 믿는 자가 더 큰 환란을 당하는가. 우리 짧은 지혜와 판단으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11:33]’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요셉을 애굽 최고의 총리의 자리로, 만국을 만민을 먹이고 살리는 자리에 세우시려고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알지 못할 때 우리 인생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매우 난해(難解)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안에 믿지 못하는 사람들안에 인생을 살아가기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 늘 불안하고 걱정만 가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 왜 이런 사람을 내가 만났어야했나. 왜 하필 내가 그런 일을 겪었어야했는가. 무수한 질문들 속에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의 한자를 배울 때, 늘 벽에 붙여놓는 게 있습니다. 천자문(千字文). 그것이 멋있는 시집인데 한자를 배우는 사람에게 한 글자도 겹치지 않게 해서 시를 지어놓은 것입니다. 그 첫 싯구가 무엇입니까. ‘천지현황(天地玄黃)’ 입니다. 하늘 천(天) 따 지(地). 먼저 하늘이 있고 땅이 있다는 것입니다. 검을 현(玄) 누루 황(黃). 하늘은 검다는 것입니다. 검다는 것은, 가물가물 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너무 너무 깊고 깊어서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그렇습니다.
우리 삶이 늘 갇히고 답답해 지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요. 내가 처한 곳만 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내 영역 내 삶의 반경속에서만 그것이 다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가 아닙니다. 내가 모르는 한없이 더 큰 세계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고전1장]에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이 사람의 지혜있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다 합쳐도 하나님께 다다를 수 없는 것입니다. [창11장] 바벨탑 이야기가 그런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 보자’해서 자기들만의 탑을 쌓아올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번에 그들을 다 흩으셨습니다. 바벨탑은 인간 교만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이 교만한 우리의 힘과 지혜로 산다는 것은 실패할 수 밖에 없고 절망할 수 밖에 없고 결국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 언제나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면 정말 편하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초에 저는 요나서도 보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1장을 읽다가 특히 2장에 이르러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가다가 결국 제비 뽑혀가지고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됩니다. 제가 특별히 많은 은혜를 받은 부분은 ‘물고기 뱃속의 요나’에 관한 것입니다. 그곳은 어떤 자리입니까. 말할 수 없는 환란의 깊은 자리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자리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요나안의 죄가 다 고백되고 회개되면서 새롭게 빚어지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환란을 당할 때 참으로 답답한 일을 겪을 때 그것에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온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일이야 말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요나는 그 안에서 깊어집니다. 연단됩니다. 전혀 새로워집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하고 은혜로운 사실은, 그의 환란을 받는 장소가 ‘물고기 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물고기가 고래였는지, 상어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걸 연구하는 분들에게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요나를 바다에 던져버렸으면 빠져 죽어야할텐데, 하나님께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물고기를 ‘예비하사’ 그를 삼키게 하시고 그 안에서 연단시키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교육, 훈육시킵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혼을 낼 때 죽어라하고 아주 미워서 혼내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 안에 품고 혼을 냅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든 바르게 자라도록 하는 마음안에서 그 사랑안에서 혼을 냅니다. 그처럼 우리가 받는 환란이라는 것 모든 어려움들이라는 것도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으라고 무너지라고 주시는 환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걸 통해 결국 우리를 더 아름답게 바꾸시고 더 잘 세워주시려고 더 좋은 길로 가게 하시려는 환란이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믿는 자들은 다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것을 아시고 전적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진짜 신앙은 어떤 경우에서도 이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증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라암셋에서 숙곳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가야할 길을 믿음세워서 가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책임지시고 가나안까지 이르는 광야의 그 모든 여정을 다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백성 앞에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백성들을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신앙의 길이란, 그 이끄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가 실수하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 하나님보다 우리가 앞서서 가려고 할 때 그렇습니다. 가령 잘못 하는 사람이 있다 할 때 인간적으로 내가 먼저 나서서 그를 심판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심판은 무흠무결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하나님께 맡겨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할바 선을 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 칭찬도 하나님께 받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에게 먼저 칭찬받으려고 할 때 우리가 실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받아버리면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게 없다. 네 받을 상을 네가 다 받았느니라. 라고 [마6장]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주실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신앙을 해야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도자 이시고 통치자 이시다는 것을 언제나 믿고 우리 ‘앞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합니다. 저는 아이 식사 예절을 가르칠 때 이렇게 가르칩니다. 먼저 기도를 가르칩니다. 먹기 전에 음식을 주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아빠 먼저 드세요. 그리고 엄마 감사해요. 가정의 권위자와 또 음식을 준비한 이의 희생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먹으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에도 이런 전후좌우 질서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도록 하는 신앙이 우리 신앙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한다는 ‘인본주의적인 사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의 틀’이 다 깨어져야합니다. 그리고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수 있도록, 우리 안에 때때로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기다림이 있고 오래참음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연약함과 부족함을 다 채우시며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길로 오묘하게 역사하시고 만사를 온전케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출13: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 구절 속에 담겨 있는 신앙의 깊은 지혜와 교훈들을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이번 한주간도 우리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열심히 또 묵묵히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의 귀하고 복된 신앙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