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12: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12: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복음은 역설의 진리라고 합니다. 이는 일반적인 논리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비우면 채워진다’ ‘낮아지면 높아진다’ ‘죽으면 산다’ 이런 말들은 어린아이에게는 거짓말과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이 진리로 다가오고 체험될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이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 지으신 자연을 통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자연(自然)’은 말의 뜻처럼 ‘스스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알고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것이기에 자연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요12:24]의 말씀은 헬라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훈련이 잘되어 있는 사람들, 머리로 새로운 지식을 얻기를 즐겨하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논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학문하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명한 학자는 학문의 방법론을 가르쳐줄 뿐 아니라 새로운 방법론도 제시해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복음인데 복음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논리나 기존의 방법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즉 그 차원을 넘어서 있는 가르침이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헬라식 사고 훈련을 철저히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관한 지식도 그 시대 어떤 유대인들보다 뛰어나게 공부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런 지식으로 바울은 크리스챤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런 그가 [행9장]을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큰 빛으로 다가오신 주님의 부르심 앞에 고꾸라졌습니다. 3일 동안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 충격은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열심으로 습득하고 경험했던 이전의 모든 지식을 무용지물화 시키는 ‘복음의 신(新)세계’에 관한 체험입니다. 사도는 복음을 알고 나니 이전의 자기 지식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빌립보 교우들에게 자기 고백과 같은 내용을 편지에 담은 것입니다. 자신이 복음이라는 고상한 지식을 알게 되니 이전의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좋은 옷을 샀을때 이전의 낡은 옷을 벗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알고 나니 이전 것들이 시시해졌습니다. 세상의 높은 지식이라고 하는 것들도 초등학문이라 여겨질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대학교 공부가 재미가 없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진리라는 것은 한없이 수준높고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 복음의 진리를 온 삶으로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이 진리가 삶속에서 체험될때 참 진리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도 ‘진리의 실천’ 내지는 ‘삶의 변화’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아무리 큰 교회가 있고 믿는 자들이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육의 방향성이자 목표입니다. 말씀을 잘 듣고 은혜도 잘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간증과 소감도 적극적으로 나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의 삶을 바꾸지 않고 진리를 순종하지 않는 자는 많은 말씀을 듣고 많은 기도와 사랑을 받았을지라도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를 잘 분별하고 가려내는 지혜가 가르치는 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이 지혜를 예수님은 [마7장15절 이하] 에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마7:21]’ 하셨습니다.
진리의 교사된 우리들은 말씀을 통해 영혼들의 삶의 변화를 이끌고 그 이끄는 바를 영혼들이 순종하는지 여부를 잘 분별해 볼 수 있어야합니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지적 유희를 즐기는 자들은 결국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사랑의 진리입니다. 사랑은 가슴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으로 실천되는 것입니다. 한국 전쟁 당시 아기를 안고 죽은 엄마의 시신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한명의 아기도 내팽겨 쳐진 경우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랑은 이처럼 이성과 논리를 넘어서 있는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이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사 생명까지 무조건적으로 내어주기까지 말할 수 없이 어리석은 삶으로 주님은 이 땅에 썩어지는 한 알의 밀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은 우리는놀라운 생명을 얻고 삶이 변화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또 이같은 기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안에는 주님의 이 사랑의 진리를 깨닫고 이전의 자기가 자랑하고 의지했던 지식을 배설물처럼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가장 고상한 지식인 예수의 사랑을 더 알고자 평생을 헌신하면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사도안에 일어난 변화와 깨달음에 제 안에도 새롭게 일어나길 원합니다. 말과 혀로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언제나 비우고 낮아지고 섬기며 희생하는 자리에서 놀라운 진리를 체험하는 자가 되글 원합니다. 그로써 많은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말씀묵상기도:
세상지식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음의 진리의 놀라운 차원성을 언제나 깨달아 살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신앙 되게 하옵소서.